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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

갈리폴리 전역과 폭염 및 혹한

갈리폴리 전역의 배경과 전략적 목표

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1915년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러시아 제국과의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ait) 공략을 시도했다. 이 계획은 오스만 제국의 전선에서 압박을 가해 서부전선의 교착 상태를 해소하고, 발칸 반도의 중립국들을 연합국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목적도 함께 내포하고 있었다.

갈리폴리 반도(Gallipoli Peninsula)는 그 전략적 요충지로 지목되었고, 이에 따라 해상과 육상 양면에서 공격이 준비되었다. 초기 해전에서 연합국 함대는 해협의 기뢰와 해안포에 막혀 큰 피해를 입었고, 이에 따라 1915425일부터 대규모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은 오늘날 ANZAC(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연합군) 군단의 역사가 시작된 계기로, 오스만군과의 지상전이 갈리폴리 전역의 중심이 되었다.

 

혹서와 질병: 갈리폴리의 여름, 인간의 한계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상륙한 1915년 봄부터 여름까지, 갈리폴리 반도는 혹독한 폭염과 위생 문제로 인해 전투 이상으로 병사들의 생존을 위협받았다. 특히 ANZAC 병사들은 노출된 절벽 지형과 식수 부족, 극심한 더위 속에서 참호를 파고 버티는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갈리폴리의 기후는 한낮 기온이 40도에 육박할 정도로 고온 건조했고, 그로 인해 병사들은 탈수와 일사병, 피부병, 이질과 같은 위생 질병에 시달렸다.

쓰레기와 배설물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고온에서 부패하면서 파리와 모기가 들끓었고, 전염병이 만연했다.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 오히려 전염병으로 쓰러진 병사 수가 더 많았으며, 특히 이질과 장티푸스는 전역 내내 연합군을 괴롭혔다. 영국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1915년 여름 갈리폴리 지역에서는 약 13천여 명의 이질 환자가 발생했고, 이는 군 전력의 약화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갈리폴리 전역과 폭염 및 혹한

 

갈리폴리의 겨울과 혹한: 이례적인 기후 재앙

1915년 말, 전선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병참 및 전략적 성과가 거의 없었던 연합국은 철수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 상황에서 11월부터 본격화된 겨울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왔다. 11월 말부터 12월 초 사이, 갈리폴리 지역에는 이례적인 강추위와 폭설이 몰아쳤고, 평소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혹한과 동상 피해가 속출했다.

ANZAC 병사들을 포함한 연합군은 동절기 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아 방한 장비와 피복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병사들이 동상과 저체온증으로 쓰러졌고, 일부 병사들은 참호 안에서 동사하는 일도 발생했다. 특히 1127일에서 28일 사이 내린 집중호우와 이어진 눈 폭풍은 참호를 무너뜨리고 사망자와 부상자를 증가시켰으며, 이미 피폐해진 연합군 사기를 결정적으로 꺾어 버렸다.

 

철수와 교훈: 기후가 좌우한 작전 실패

이러한 극단적인 기후 조건, 즉 여름의 폭염과 겨울의 혹한은 연합군의 전투 능력을 크게 저하시켰고, 전략적 실패와 함께 갈리폴리 전역은 철수라는 결론을 낳게 되었다. 191512월부터 19161월 사이, 연합군은 결국 작전을 포기하고 질서정연한 철수를 감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철수 작전은 전투 중 가장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대규모 인명 손실 없이 마무리되었다.

갈리폴리 전역은 군사적으로는 명백한 실패였지만, 오늘날까지 기후가 전쟁의 양상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다. 군사 전략, 병참, 위생 문제에 대한 준비 부족은 물론, 극단적인 기후 변수에 대한 오판이 전장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준 갈리폴리 전역은 현대전에서도 반복되는 환경 문제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