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 이야기

십자군의 카이로 공성전과 나일강 범람

7차 십자군과 루이 9세의 이집트 원정

1248, 프랑스의 국왕 루이 9세는 예루살렘의 탈환과 기독교 세력의 부흥을 위해 제7차 십자군을 결성하고 이집트를 침공한다. 이는 십자군 역사상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이전까지의 원정이 주로 성지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것과 달리, 루이 9세는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이집트를 직접 겨냥했다. 그는 이집트를 장악하면 예루살렘을 비롯한 레반트 지역 전체를 압박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루이는 약 1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1249년 다미에타(Damietta)를 점령하며 첫 전투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남쪽의 수도 카이로(Cairo)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하지만 그는 이집트의 자연환경, 특히 나일강(Nile River)의 범람 주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치명적인 패착이 되었다.

 

십자군의 카이로 공성전과 나일강 범람

 

나일강 범람과 십자군의 진군 차질

이집트는 매년 여름철, 나일강이 범람하는 자연 현상을 겪는다. 이 범람은 고대 이집트 문명을 가능케 했던 핵심적인 생태적 특징이지만, 동시에 군사 작전에는 큰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루이 9세가 카이로로 진격하던 12501~2월은 범람기 직후였으며, 나일강 지류와 인근 저지대는 여전히 물에 잠겨 있었다. 십자군은 익숙하지 않은 습지와 늪지대에서 진군하게 되었고, 특히 전차와 보급 수레는 진창에 빠지며 이동에 극심한 차질을 빚었다. 기병대 역시 말이 진흙에 빠지거나 발을 헛디디는 일이 잦았고, 보병들은 발목까지 잠기는 물웅덩이 속에서 행군해야 했다. 나일강의 홍수로 인해 형성된 운하와 소하천들은 지도에 나타나지 않아 기습과 우회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처럼 범람기 이후의 수변 지형 변화는 십자군의 작전을 정체시키고 전략적 기동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병참의 붕괴와 역병의 창궐

기후 조건이 만든 지형 변화는 단순히 이동을 방해하는 것을 넘어, 병참선의 붕괴를 초래했다. 진창과 늪지대로 인해 보급선은 원활히 유지되지 못했고, 다미에타와 카이로 사이의 보급 루트는 사실상 차단되다시피 했다. 십자군 병사들은 식량과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늪지대에서 퍼진 이질 같은 수인성 질병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병사들은 물웅덩이나 범람한 지류의 더러운 물을 마실 수밖에 없었고, 이는 장기적인 병력 손실로 이어졌다. 루이 9세는 군의 사기를 유지하고 보급을 회복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 휴전을 시도했지만, 이집트의 집권 세력이었던 마무룩(Mamlūk) 장군 바이바르스(Baybars)와 쿠투즈(Qutuz)는 이를 거절했다. 그들은 오히려 범람 지형을 적극 활용해 십자군의 진영을 포위했고, 결국 십자군은 공세를 포기하고 무리하게 철수를 시도하다가 알 만수라 전투(Battle of Al Mansurah)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루이 9세의 포로 생활과 기후가 남긴 교훈

12504, 루이 9세는 나일강 근처의 파루스쿠르(Fariskur)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집트군에 생포된다. 이는 유럽의 국왕이 전장에서 직접 포로가 된 드문 사례로 기록된다. 프랑스군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루이 9세를 포함한 잔존 병력을 송환해야 했으며, 7차 십자군은 이로써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이 원정은 기독교 세계에 심리적 충격을 안겼을 뿐 아니라, 유럽 내 십자군 운동의 동력도 점차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의 실패는 단순한 전략 미비나 병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자연환경에 대한 무지와 준비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나일강 범람이라는 이집트 고유의 기후·지형적 조건을 간과한 점은 치명적인 전략적 오판이었다. 이후 유럽 국가들은 중동이나 아프리카로의 군사 원정에서 기후와 자연환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을 필수 전략 요소로 간주하게 되며, 제국주의 시기의 식민지 개척에도 이러한 교훈이 반영되었다. 기후와 전쟁의 관계는 이처럼 고대와 중세, 근대를 막론하고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해왔음을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