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이야기 (22) 썸네일형 리스트형 카를 대제의 작센 정복 1. 카를 대제와 작센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카를 대제(Charlemagne, 재위 768~814)는 유럽 중세 초기에 프랑크 왕국을 통일하고,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프랑크 왕국은 유럽 최대의 기독교 세력으로 부상하였으며, 여러 이교도 지역을 정복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작센(Saxony)은 현재의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게르만계 부족들의 연합체로, 당시까지도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대표적인 이교 지역이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무장력이 강하고 저항 의지가 강한 부족이었으며, 프랑크 왕국의 국경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카를 대제는 작센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왕국의 북부 국경.. 투르 전투 이슬람의 유럽 확장 저지를 위한 프랑크 왕국의 저항1. 투르 전투의 역사적 배경과 이슬람 세력의 확장8세기 초, 이슬람 제국은 아라비아반도에서 시작된 정복 활동을 통해 빠르게 세계사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우마이야 왕조(661~750)는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하며 서유럽의 문턱에 도달했다. 특히 711년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이슬람군이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베리아반도를 장악하면서, 이슬람의 군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의 영토에 위협을 가하게 된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 하에 있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궁재(宮宰)였던 샤를 마르텔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슬람군은 720년대부터 갈리아 남부에 대한 일련의 습격을 이어갔으며, 732년에는 압드 알라흐만 이.. 흉노와 월지의 충돌 유목 제국 흉노의 흥기와 팽창 정책기원전 3세기 말, 진나라가 붕괴된 중국 북방에서는 흉노가 급부상하며 동아시아 초원 지대의 패권을 장악했다. 묵돌 선우(冒頓單于, 또는 묵특 선우)는 유능한 군사적 리더십을 발휘해 동호를 정복하고, 한나라와의 전투에서도 우위를 점하며 강력한 유목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 흉노는 기마 전술을 기반으로 한 기동전과 빠른 정보 수집, 복속 부족의 활용을 통해 초원 지대의 국제 질서를 주도했다. 흉노의 영향력은 단순히 동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중앙아시아와 서역 지역까지 그 지배력을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서쪽 변경에 위치한 유목 민족인 월지(月氏)와 충돌하게 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부족 간의 충돌을 넘어 초원 지대의 세력 지형을 뒤바꾸는 사건으로 발전한다. 흉노는 자.. 페니키아 해상 전쟁 해상 상업 강국 페니키아의 도시 국가 체제고대 근동에서 해상 무역의 주도권을 쥔 문명 가운데 페니키아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에 해당하는 해안선을 따라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이 흩어져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티레(Tyre), 시돈(Sidon), 베블로스(Byblos), 아라드(Araudus) 등이 핵심적인 중심지였다. 이들 도시는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가 아니라 각각 독립적인 정치 체제를 유지하며 상업 경쟁을 벌였다. 페니키아인들은 뛰어난 조선 기술과 항해술로 지중해 전역에 무역망을 형성했고, 키프로스, 크레타, 카르타고, 심지어 지브롤터 너머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무역로 확보와 시장 지배를 둘러싸고 도시 간 경쟁이 격화되었고, 이는 단순한 경제적 경쟁을 넘어 해상 주도권을 둘러싼 무력 충돌.. 무티나 전투 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 내전의 서막 카이사르 암살 이후의 혼란과 옥타비아누스의 부상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공화정파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당하면서 로마는 심각한 정치적 혼돈에 빠졌다. 카이사르는 죽기 전 조카이며 양자였던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당시 스무 살의 젊은 옥타비아누스는 정치 기반이 거의 없었지만, 민중의 지지와 카이사르의 유산을 무기로 빠르게 세력을 키워갔다. 반면, 카이사르 생전의 유력한 동맹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콘술(집정관)로서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그는 갈리아 속주의 통치권을 요구하며 이를 점거한 공화정파 인사인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포위한다. 이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병력을 맡겨 그를 견제하게 했다. 이 갈.. 필리피 전투 브루투스·카시우스 vs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공화정 몰락 필리피 전투의 배경과 로마 공화정의 위기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되면서 로마 공화정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암살을 주도한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는 ‘폭군 제거자’로 자처하며 공화정 수호를 외쳤지만, 오히려 로마의 정치 지형은 급격히 분열되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us, 훗날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측근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는 이 암살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예고했고, 결국 세력 균형은 무력 충돌로 치달았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칸나에 전투 한니발 vs 로마, 포위섬멸 전술의 전범 1. 칸나에 전투의 배경과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6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이 전쟁은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시작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본토로 침입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한니발은 앞서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 등에서 연이어 로마군에 큰 타격을 입히며 전쟁 주도권을 잡았고, 결국 로마는 본토 방어를 위해 대규모 병력을 조직하게 된다. 이때 로마는 무려 8만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한니발을 정면으로 꺾으려 했는데, 그 결정적인 충돌이 벌어진 곳이 바로 칸나에(Cannae)였다. 칸나에는 이탈리아 남동부의 평야 지역으로, 전술적 기동이 용이.. 알레시아 공방전 카이사르 vs 베르킨게토릭스 / 갈리아 정복 완결 1. 알레시아 공방전의 역사적 배경과 갈리아 전쟁의 흐름기원전 52년,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역을 평정하기 위한 마지막 대결에 임하게 된다. 갈리아 전쟁은 카이사르가 기원전 58년부터 벌인 일련의 정복 전쟁으로, 정치적 야망과 로마 공화정 내부의 권력 투쟁이 그 배경에 있었다. 이 전쟁의 마지막 국면에서 주목할 인물은 갈리아 부족 연합의 지도자인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이다. 그는 갈리아의 독립을 위해 여러 부족을 규합해 로마에 맞섰고, 알레시아(Alesia)라는 요새 도시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했다. 알레시아는 오늘날 프랑스 동부 코트도르 주 지역에 있었으며, 사방이 계곡과 구릉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이 지형..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