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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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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헤 전투 로마(크라수스) vs 파르티아, 제국의 오만이 부른 참패 1. 삼두정치의 야망과 크라수스의 동방 원정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은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로 구성된 제1차 삼두정치 체제 하에 있었다. 이들 중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진압과 막대한 부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지만, 군사적 명성과 대외 정복의 업적에서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게 밀리는 위치였다. 이에 대한 보상심리와 정치적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파르티아 원정이다. 당시 파르티아는 사산조 이전 중동 지역을 지배하던 강력한 동방 제국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란 고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공식적인 원로원 승인 없이 개인적인 결정으로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를 거쳐 동방으로 진군했다. 그는 페르..
가우가멜라 전투 알렉산드로스 대왕 vs 다리우스 3세, 동서 문명의 충돌 동서 문명의 갈림길 – 가우가멜라 전투의 역사적 배경기원전 331년,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에서 벌어진 가우가멜라 전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가 벌인 결정적인 충돌로, 동서 문명이 충돌한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닌, 그리스-마케도니아 세계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간의 패권 다툼이자, 제국의 흥망을 가른 대결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이수스 전투(기원전 333년)에서 다리우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이집트를 평정하고, 본격적으로 페르시아의 심장부로 진격하고 있었다. 다리우스 3세는 이전 패배를 만회하고자 약 10만에서 25만 명으로 추정되는 대군을 모았고, 자신에게 유리한 ..
이수스 전투 – 알렉산드로스 대왕 vs 다리우스 3세 1.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과 이수스 전투의 배경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유산을 계승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위에 오른 뒤,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의 구실은 페르시아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오랫동안 간섭하고 괴롭혀왔다는 복수의 논리였지만, 실제로는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 세계를 넘어 아시아까지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야망이 깔려 있었다. 그는 헬레스폰트를 건너 아시아 소아시아(현재의 튀르키예 지역)에 상륙한 후, 그라니쿠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지방 총독들을 물리치고 소아시아 서부를 장악했다. 다리우스 3세는 처음에는 이를 크게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빠른 속도로 내륙을..
레우크트라 전투 – 테베 vs 스파르타 1. 스파르타 패권 체제의 균열과 테베의 부상기원전 371년, 고대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여파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아테네가 쇠퇴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한 스파르타였으며, 그리스 전역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실상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통치는 권위적이었고, 특히 보이오티아 지역의 도시국가들은 점차 이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테베는 그 중심에 있었으며, 보이오티아 동맹의 실질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스파르타에 저항할 역량을 갖추기 시작했다. 테베의 주요 장군인 엡아미논다스와 펠로피다스는 군사적 역량 강화를 추진하며 기존 질서에 도전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스파르타는 테베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단행했고, 그 결과 양측은 보이오티아..
히메라 전투 – 시라쿠사 vs 카르타고, 서방 지중해 전투서쪽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 – 히메라 전투의 배경기원전 480년, 지중해의 동쪽에서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치열한 테르모필레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서쪽 지중해에서도 또 하나의 중대한 전투가 벌어졌다. 바로 시칠리아섬의 히메라 전투였다. 이 전투는 시라쿠사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계 시칠리아 도시국가 연합과, 북아프리카를 기반으로 한 강대국 카르타고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충돌이었다. 히메라는 시칠리아 북부 해안에 위치한 전략적 거점 도시로, 상업과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녔다. 카르타고는 이전에도 시칠리아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시도했지만, 그리스계 도시국가의 강한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카르타고는 기원전 6..
테르모필레 전투 – 스파르타 vs 페르시아 1. 테르모필레 전투의 배경 –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갈등기원전 5세기, 고대 세계는 동서 문명의 충돌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격랑 속에 있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긴장은 이미 마라톤 전투에서 한 차례 폭발했으며, 이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이러한 갈등의 정점 중 하나로,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발생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아시아와 중동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유럽 대륙까지 영향력을 넓히고자 했다. 이에 맞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힘을 모아 방어 연합군을 조직했고, 전략적 요충지였던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저항을 선택했다. 테르모필레는 ‘뜨거운 문’이라는 뜻을 가진 좁은 협곡으로, 대군의 진입을 차단하기에 적합한 지형이었다...
엑바타나 전투 시리아 제국의 몰락과 메디아-바빌로니아 동맹의 결정적 승리 1. 아시리아 제국의 절정과 쇠퇴 – 제국주의의 한계에 직면하다기원전 7세기 후반, 아시리아 제국은 근동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 제국은 오랜 기간에 걸친 대외 정복을 통해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합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군사 원정과 피지배민에 대한 과도한 수탈, 반란 진압에 따른 내부 피로는 점차 제국의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슈르바니팔 왕 사후(기원전 627년경)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아시리아 내부는 귀족 세력 간 분열과 각 지역 총독들의 독립 움직임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노리고 신흥 세력들이 부상하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메디아 ..
살라미스 해전 살라미스 해전의 배경 – 페르시아 전쟁과 그리스 세계의 위기기원전 5세기 초, 동서양의 대충돌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이르기까지 소아시아를 넘어 그리스 본토로까지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했던 페르시아는 다시 대규모의 원정군을 조직하여 그리스를 침공했고, 기원전 480년에는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온 해전 등에서 그리스 연합군과 격돌하였다. 그러나 레오니다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함락되고, 아크로폴리스는 불탔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테네의 전략가 테미스토클레스는 해전을 통해 역전의 기회를 모색하게 된다. 그의 주도로 그리스 연합 함대는 살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