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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전쟁 이야기

필리피 전투

브루투스·카시우스 vs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공화정 몰락

필리피 전투

 

 

필리피 전투의 배경과 로마 공화정의 위기

기원전 44,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되면서 로마 공화정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암살을 주도한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폭군 제거자로 자처하며 공화정 수호를 외쳤지만, 오히려 로마의 정치 지형은 급격히 분열되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us, 훗날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측근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는 이 암살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예고했고, 결국 세력 균형은 무력 충돌로 치달았다. 기원전 43,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레피두스로 구성된 제2차 삼두정치(Second Triumvirate)가 출범하고, 이들은 암살자들에 대한 체포령과 자산 몰수를 공포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동방으로 피신해 병력을 모았고, 마침내 기원전 42, 마케도니아의 필리피 평야에서 두 진영이 충돌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단순한 권력 싸움을 넘어서, 로마 공화정의 존속 여부를 가르는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전략과 동방의 병력 동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동방의 여러 속주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군을 조직해 약 19개 군단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피 근처에 진지를 구축하고, 험준한 지형을 활용해 방어적 입장을 취했다. 카시우스는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군으로 병참선 관리와 포위 전략을 중시했고, 브루투스는 군사적 명성은 다소 부족했지만 고귀한 혈통과 정치적 명분으로 병사들의 충성을 이끌어냈다. 반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28개 군단을 편성했지만, 해상 운송 과정에서 일부 병력과 보급이 차질을 겪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강력한 추진력과 적극적인 공성 활동으로 수세를 만회했으며, 마침내 두 진영은 필리피 평야에서 맞붙게 된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지형을 활용한 수세 전략을 고수했지만, 그 결정은 곧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특히 내분과 명령 불일치가 이들의 작전에 악영향을 끼쳤고, 정치적 이상에 비해 군사적 현실 대응이 부족했던 점은 이후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필리피 전투의 전개와 공화정 진영의 붕괴

필리피 전투는 총 두 차례의 주요 교전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전투는 기원전 4210월 초에 벌어졌고, 브루투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을 돌파하며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에게 패배하고 자결한다. 카시우스는 브루투스의 승리를 알지 못한 채 패색이 짙다고 판단하고 비극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공화정 측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전열 정비에 큰 혼란이 발생했다. 열흘 후에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주도적으로 진군하며 브루투스의 방어진을 돌파했고, 브루투스 역시 패배 후 자결하면서 공화정 진영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2만 명의 로마군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저항 세력이 사라진 셈이다. 이 전투는 단순한 전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체제 전환을 상징하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로마의 정치는 더 이상 원로원의 논의와 귀족 중심의 운영이 아닌, 군사력에 기반한 제왕적 권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필리피 전투 이후의 정치 변화와 제정의 서막

필리피 전투의 결과는 로마 제정의 기틀을 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패배로 인해 공화정을 옹호하는 세력은 더 이상 정치적 기반을 유지할 수 없었고, 2차 삼두정치가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하지만 승리한 연합 내부에서도 권력 투쟁은 곧 표면화된다. 레피두스는 곧 실권을 잃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며 내전이 재개된다. 결국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결정적으로 꺾고, 기원전 27년에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아 초대 로마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필리피 전투는 이런 흐름의 시발점으로, ‘공화정의 이상과 시민권의 자유황제의 권력과 군사력에 의한 질서로 대체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로마 시민들은 정치적 자유보다는 안정과 평화를 택했고, 이는 이후 약 200년간 지속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필리피 전투는 단순한 내전의 한 장면이 아닌, 서양 정치사 전체를 바꾸는 거대한 변곡점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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