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제국의 몰락과 메디아-바빌로니아 동맹의 결정적 승리
1. 아시리아 제국의 절정과 쇠퇴 – 제국주의의 한계에 직면하다
기원전 7세기 후반, 아시리아 제국은 근동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 제국은 오랜 기간에 걸친 대외 정복을 통해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합하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군사 원정과 피지배민에 대한 과도한 수탈, 반란 진압에 따른 내부 피로는 점차 제국의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슈르바니팔 왕 사후(기원전 627년경)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아시리아 내부는 귀족 세력 간 분열과 각 지역 총독들의 독립 움직임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노리고 신흥 세력들이 부상하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메디아 왕국과 신바빌로니아 왕국이다. 이 두 나라는 정치적·전략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동맹을 형성했고, 이들은 아시리아 제국의 심장부를 향한 대규모 공세를 준비했다. 그 결정적 충돌이 바로 엑바타나 전투였다.
2. 엑바타나 전투의 전개 – 메디아-바빌로니아 동맹의 전략적 협공
엑바타나 전투(Battle of Ecbatana)는 기원전 615년경, 오늘날 이란의 함단(Hamadan) 지역에 위치한 고대 메디아의 수도 엑바타나(Ecbatana) 인근에서 발생한 일련의 군사 충돌을 가리킨다. 메디아의 왕 키악사레스(Cyaxares)는 이 지역에서 아시리아 동부 방면으로의 진출을 시도했고, 동맹국인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의 바빌로니아 군이 지원군으로 합류하며 대규모 동맹 전선이 형성되었다. 엑바타나는 메디아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전략적 거점으로, 아시리아가 과거 이란 고원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재공세를 펼치던 지역이기도 하다. 일부 바빌로니아 연대기 문서에 따르면, 이 시기 메디아와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 동부 전선을 무력화하고, 티그리스 강 중류 지대까지 진군하는 데 성공했다. 엑바타나 전투는 단일 전투라기보다는 메디아 왕국이 중심이 된 일련의 반격 작전과 바빌로니아 지원 병력의 연합 작전을 의미하며, 아시리아 방어선이 이때부터 뚜렷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3. 전술과 병참의 결정적 차이 – 제국군과 동맹군의 충돌 양상
엑바타나 전투에서 아시리아군은 전통적으로 강점을 가졌던 철기 중무장 보병과 전차를 주력으로 투입했지만, 전투가 벌어진 고원 지대와 산악 지형에서는 그 효율성이 크게 제한되었다. 반면, 메디아 군은 기동력 있는 기병과 산악 전투에 능한 부대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바빌로니아 군은 투석기와 공성 기술을 활용한 도시 공격에 특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호 보완적 전투 방식은 아시리아군의 방어를 교란하고 주요 거점을 효과적으로 함락시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아시리아는 이중 전선을 방어해야 했으며, 내부에서는 이미 반란과 분열이 일어나 병력 동원이 원활하지 않았다. 엑바타나 지역에서의 패배는 단지 영토 상실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전략적 주도권의 상실을 의미했으며, 이로 인해 메디아-바빌로니아 동맹군은 이후 니네베(Nineveh)와 아슈르(Ashur) 같은 중심 도시들을 향한 공세를 본격화하게 된다. 엑바타나는 제국의 외곽 방어선이 무너지는 상징적 출발점이 되었다.
4. 엑바타나 전투의 역사적 의의 – 고대 근동 질서의 대전환점
엑바타나 전투는 단지 메디아 왕국의 방어 성공이나, 아시리아 동부 방면에서의 국지적 충돌이 아니라, 근동 전체의 권력 지형을 뒤흔든 전략적 분기점이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아시리아는 방어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이후 612년의 니네베 함락, 609년의 하란 함락으로 이어지며 제국은 공식적으로 붕괴하게 된다. 엑바타나에서 승기를 잡은 메디아는 서부 이란과 아나톨리아 동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의 패권 국가로 부활해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로써 수세기 동안 유지되던 아시리아 중심 질서는 해체되고, 메디아-바빌로니아-이집트 간의 3파전 구도가 형성된다. 엑바타나 전투는 이러한 구조 변화의 시발점으로서, 단지 고대 전쟁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제국 체제의 전환과 동서 문화 교류의 방향을 바꿔놓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엑바타나 전투를 아시리아 제국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고 있으며, 후속되는 니네베 함락과 더불어 고대 근동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의 일부로 해석한다. 이 전투는 고대 국제질서의 전환이라는 맥락에서 연구되고 있으며, 당시 제국 간 세력 균형의 흐름을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고대 전쟁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르모필레 전투 – 스파르타 vs 페르시아 (0) | 2025.06.23 |
---|---|
살라미스 해전 (0) | 2025.06.23 |
마라톤 전투 (1) | 2025.06.23 |
트로이 전쟁: 신화와 현실 사이 (8) | 2025.06.22 |
메소포타미아 초기 국가 간 전쟁과 수메르의 몰락 (3) | 2025.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