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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야기

쾰른 선제후 전쟁

종교개혁 시대, 신성로마제국 선거권을 둘러싼 충돌

 

종교개혁의 여파와 선제후령의 정치적 위기

16세기 후반 유럽은 종교개혁의 물결로 정치적 균형이 흔들리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가톨릭과 루터교, 칼뱅주의가 공존하는 다종교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제국 내 주요 직위인 선제후령(Electorate)에까지 종교 분열이 영향을 미치면서 심각한 갈등이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쾰른 선제후령(Electorate of Cologne)은 제국 내 7개 선제후 중 하나로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1582, 쾰른 대주교이자 선제후였던 게브하르트 트룬크 폰 발데크(Gebhard Truchsess von Waldburg)는 개신교, 정확히는 칼뱅주의로 개종하면서 종교적, 정치적 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의 개종은 단순한 신앙의 변화가 아니라, 제국법과 교회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결정이었다. 게브하르트는 동시에 쾰른 선제후령을 세속 영지로 만들고자 시도하며, 종교개혁 세력의 영향력을 교회 제후의 핵심 직위로 확장시키려 했다. 이는 곧 제국과 교황청, 가톨릭 제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선거권을 둘러싼 내전의 발발

게브하르트의 개종은 쾰른 내의 종교적 분열과 더불어 신성로마제국 전체의 권력 균형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가톨릭 진영은 그를 쫓아내고 새로운 대주교로 에른스트 폰 바이에른(Ernst von Bayern)을 선출했다. 그는 바이에른 공국의 공작 빌헬름 5세의 아들이자, 강력한 가톨릭 옹호자였다. 결국 쾰른 대주교령은 두 인물이 동시에 통치권을 주장하는 이중 구조에 빠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1583년 무력 충돌, 즉 쾰른 선제후 전쟁(Cölner Krieg)이 시작되었다. 게브하르트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등 개신교 세력의 지원을 기대했으나, 실질적인 군사적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반면 에른스트는 스페인과 바이에른의 적극적 군사지원을 받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해 나갔다. 특히 스페인군의 개입은 쾰른 지역뿐 아니라, 독일 내 개신교 세력 전반에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이 전쟁은 종교적 대립을 넘어, 서유럽 전체의 세력 균형과 국제 정치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였다.

 

쾰른 선제후 전쟁

 

전쟁의 전개와 에른스트의 승리

전쟁은 초기에는 각 도시와 귀족들이 양 진영으로 나뉘어 충돌하는 국지적 전투의 형태를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외세 개입이 심화되면서 격렬한 군사 충돌로 확대되었다. 1583~1585년 사이 쾰른 일대의 주요 성채와 도시들이 연달아 함락되었으며, 게브하르트는 점차 방어선을 잃고 도피를 거듭했다. 반면, 에른스트 측은 스페인군과 바이에른군의 공세로 지속적인 영토 장악에 성공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에게 정식 승인을 부여했다. 1585년 이후 게브하르트는 사실상 패배 상태에 놓였고, 최종적으로 1588년 공식적으로 쾰른 선제후령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며 정치적 생명을 마감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승패를 떠나, 가톨릭 진영이 신성로마제국 내 선제후령에서 종교개혁의 확장을 단호히 차단한 사례로 기록되며, 후속적인 종교 내전과 30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쾰른 선제후 전쟁의 역사적 의의

쾰른 선제후 전쟁은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종교개혁의 세력이 교회 직위와 제후권을 동시에 장악하려는 최초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에서 정한 통치자의 종교는 백성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 원칙의 해석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게브하르트는 통치자의 개종이 곧 국가의 종교 전환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교황청과 제국의 반응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이 전쟁은 스페인의 군사적 개입을 통해 독일 지역의 종교 분쟁이 국제전 양상으로 확산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는 이후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거대한 갈등의 전조로 간주된다. 쾰른 선제후 전쟁은 외형적으로는 지역적 종교 내전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종교개혁과 제국 법질서, 교황권, 국제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구조적 갈등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가톨릭 교회는 제국 내 핵심 권력 구조에서의 주도권을 재확인하였고, 개신교 세력은 더 큰 결집과 조직화를 모색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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